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완 독립운동 (문단 편집) === 민주화 이전 === 국공내전 말기 미국이 타이완을 별개의 국가로 독립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검토 단계에서 중단되었고 국민당이 1955년 쑨리런 쿠데타 모의 사건을 구실로 [[쑨리런]][* 친미주의자로 본토 수복을 포기하고 타이완의 방어를 견고히 해야한다고 주장했다.]을 연금시키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1950년]] 즈음에 일본, 홍콩, 미국, 캐나다의 본성인 화교들이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1971년]] 10월 [[유엔]] 총회에서 중화민국이 쫓겨나기 직전 실제로 대만 공화국이 건국될 뻔하기도 했다. 당시 공산권과 제3세계 비동맹 국가들의 지지속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CHINA) 대표 권한을 인정하는 제2758호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중화민국을 대신해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과 [[장제스]]의 측근들은 중화민국이 유엔에서 탈퇴하는 대신 '''중화대만공화국(Chinese Republic of Taiwan)'''이라는 새로운 국호로 재가입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력과 위상은 지금만은 못했기에 이런 타협안조차 강력 저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UN 회원국 지위를 유지한 대만은 최소한 지금같은 외교적 고립무원에 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 대만 독립파들은 유엔의 중화민국의 축출 결정을 오히려 환영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점령자'인 장제스 정권의 타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놓고 환영했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갈 수 있으니 속으로만. 어찌 보면 일제 때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이 2차 대전 때 일본의 패배를 바랐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쑹메이링]]의 강경한 반대와 장제스 본인에게 아직 남아 있던 본토에 대한 미련으로 이 제안은 거부되었고,[* 냉정하게 보면 자신들의 국력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한 장제스 정권의 명백한 실책이다. 1971년이면 1949년 국공내전 패배로부터 벌써 20년이 흐른 시점으로 중국공산당의 대륙본토 통치는 이미 강력하게 뿌리내렸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상태에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그저 적개심에 휩싸여서 본토수복만을 외치면서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결국 대만은 이 때 축출된 이후 아직까지도 UN에 재가입하지 못하고 국제사회에서 국가이지만,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대만의 민주화운동은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국민당 독재시기에 민주화나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反국가적인 것으로 가차없이 탄압되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스파이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리기도 했다. [[민남어]]를 비롯, 본성인 문화도 강력히 탄압되었다. 당시 대만에서 얼마나 본성인 문화를 탄압했냐면, 각급학교에서 민남어를 쓰다가 선생님에게 걸리면 벌을 받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